1. 화려함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인도나 중국, 그리고 터키의 도자기들이 서유럽에 널리 확산되었던 17세기 이래 '동양'은 늘 패션 디자이너에게 영감의 근원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약 1900년경부터 서양 디자이너들이 아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다양한 문화로부터 온 이국적인 스타일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초 절정에 달하여 '동양의 모든 것'에 대한 열광은 '천일야화'의 인기처럼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전설에 대한 향수에서부터 1900년 파리에서 데뷔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단 발레 뤼스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이 다양했다. 패션 분야에서 동양의 영감을 받아 폭발된 창조성의 근원 중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예술운동 야수주의와 서구 시장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 기모노도 있었다.
폴 푸아레와 잔느 파캥 등의 프랑스 쿠튀리에들은 발레 뤼스의 공연 '클레오파트라', '세에라자드' 등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 러시아 무용단은 혁명적인 안무와 음악 그리고 러시아 예술가 레온 박스트가 디자인한 무대와 의상으로 파리를 사로잡았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환상적인 의상 형태와 현란한 장식 요소에다 앙리 마티스 같은 야수파 화가들이 사용한 선명한 색채들을 반영하였다. 패션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모자 디자이너들도 동양의 영향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백로나 타조 깃털로 터번을 장식하거나 보석으로 치장한 터번들을 신고전주의풍이나 이국적인 의상과 함께 착용하였다.
현대 디자이너들이 동아시아의 복식 요소들을 받아들이면서 20세기 패션에 결정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1854년 일본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수출하기 시작한 기모노는 그중 최고의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직물을 존중하는 일본의 옷은 상체를 코르셋으로 조이고 바닥에 끌리는 길고 풍성한 스커트로 여성의 신체를 분리시키는 유럽식 직무 재단을 허용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0년 전에는 코르셋은 거의 사라질 것 같았으며, 칼로 하우스의 마리 칼로 케르베르 같은 개혁적인 쿠튀리에르들은 헐렁하게 늘어지는 모노의 특성에 영감을 받았다. 넉넉한 소매와 가슴 부분에서 교차되는 기모노 여밈의 특징을 이브닝드레스에 활용한 오페라 코트는 박쥐 날개를 단 누에고치처럼 인체를 감쌌다.
마담 게르베르는 하렘팬츠의 초기 형태인 터키 스타일 팬츠를 창안하였으며, 1910년 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아름답고 여성적인 스타일로 인기를 누리던 리타 드 아스코타리딕은 게르베르와 함께 동양 의상 버전들을 만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새로운 댄스 열풍이 불어온 후 탱고 드레스라고 불렀던 바지처럼 만든 원피스 같은 스타일은 쿠튀리에르 루실,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폴 이리브, 조르주 바리브에, 조르주 르파프가 유행시켰다.
2. 패션계의 여성들
1890년 몇몇 여성디자이너들이 시작한 패션 사업은 20세기 초 패션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93년 파리에서 네 자매가 설립한 칼로 자매 하우스(The House of Callot Soeurs)는 처음에는 레이스 가게로 시작하였으나 곧 본격적인 쿠튀르로 발전하였다. 특히 레이스와 자수를 사용한섬세하고 아름다운 옷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잔느 랑뱅도 자신의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여 낭만주의와 결합된 단순함과 소박함이 조화된 특유의 감성으로 마감한 아름다운 옷들을 만들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루실이라고 불린 레이디 더프 고든은 영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으로 성공한 쿠튀리에르가 되었다. 그녀의 디자인 미학은 고상한 드라마의 감각과 매혹적인 여성성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1891년 잔느 파캥과 남편 이시도르는 파리의 라 페 거리에 파캥하우스를 오픈하였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새로운 패션을 원하던 여성들을 매료시킨 이 패션 하우스는 단시간 내에 벨 에포크의 스타일을 선도하는 가장 큰 쿠튀르가 되었다. 언론은 그들 특유의 젊음과 현대성 그리고 고도의 세련미를 가리켜 파캥스럽다는 의미를 가진 '파캥네스트(Paquinesque)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다. 활동 시작 8년 만에, 파캥은 많은 디자이너들의 추천으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개최된 제1회 쿠튀르 단체전의 대표를 맡게 되었으며, 금색 장미를 수놓고 알랭송레이스로 장식한 호화로운 블루 벨벳 티 가운을 자신을 본 따 만든 밀랍 마네킹에 입혀 화장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전시에 연출했다. 항상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착용한 파캥은 자연히 편안함이나 기능성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호사스러운 옷을 만들기도 하였지만 구속적인 패션에서 벗어나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복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의 주요 연결고리가 되는 작품들을 발표하여 '현대 의상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1905년부터 파캥은 하이 웨이스트의 집정이 양식 드레스를 꾸준히 장려했다. 이 스타일은 곧고 자연스러운 자세와 함께 최소한의 보정용 속옷만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폴 푸아레가 1908년에 선보이는 극단적인 '헬레닉' 디자인의 전조가 되었다. 1912년 파캥은 특별히 스포츠용뿐만 아니라, 테일러링과 드레이핑을 결합시켜 낮부터 저녁까지 착용이 가능한 의상을 디자인하였으며 기능적이면서 세련된 발목 길이의 청색 서지 슈트를 즐겨 입었다. 탱고 재즈 댄스의 열광에 부응하여 탱고 드레스도 디자인하였는데, 당시 유행이던 호블 스커트의 좁은 실루엣을 유지하면서도 안쪽에 숨은 주름을 잡아 움직임을 편하게 하였다. 이러한 스타일은 슈트와 데이 드레스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현하였으며, 인기는 코코 샤넬이라는 차세대의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가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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